광산김씨

[스크랩] 광산김씨(光金)의 발상지(發祥地) / 평장동(平章洞)을 찾아서 ...

팔마산 2010. 10. 22. 21:48

 

 

   여행일자 : 2010년 7월 24일(토) ~ 7월 25일(일)

   여행목적 : 광산김씨 부산시종친회 임원 하계 단합대회  

   촬영장소 : 전남 담양군 대전면 평장동(대치리) 

   여행지 : 전남,  - 벌교(꼬막정식) - 무안 하소 회산백련지 - 해남 땅끝기와집 정식 - 강진 백련사(탬플스테이)/해남(1박) - 두륜산 대흥사 - 두륜산 케이블카

               - 담양(명옥헌) - 광산김씨 성지(평장동) - 귀가

   사진사 : 촌장셈 (김진수/양촌재)

   사진설명 : 마지막 여행지 / 광산김씨(光金)의 발상지(發祥地) / 평장동(平章洞)을 찾아서 ...

 

광산김씨(光金)의 발상지(發祥地) / 평장동(平章洞)  @2010  사진사 : 촌장셈(양촌재) 김진수

 

  마지막 담양여행이다.

  배롱나무가 아름다운 정원 '담양 명옥헌'을 찾았으나, 갑자기 내리는 소낙비로 일행들은 모두들 속옷까지  옴팍 젖었다.

  더 이상의 죽녹원 등 여행일정을 포기하고, 마지막으로 광산김씨의 성지(聖地) / 광산김씨의 발상지인 평장동 평장사를 찾았다. 

 

 

 

 

 "평장동(平章洞)"은  광산김씨의 영원한 마음의 고향이자 광김의 성지이다  

 

평장동의 유래 :

우리 광산김씨의 시조는 신라 왕자공(휘 흥광)이시다

신라말에 장차 난(亂)이 있을 것을 예견하시고 세상이 어지러움을 한탄하시며, 금성(現, 경주)을 떠나 무진주 서일동(現, 담양군 대전면 평장리)에

은거하시어 학문을 닦으시고 예(禮)를 강(講) 하시었다.

 

그 후 려조(麗朝)에 누대(累代)에 걸쳐 평장사(平章事/ 現, 부총리급)가 배출되어 서일동을 사람들이 평장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후손들이 번창하고 고려와 조선을 통해 도덕과 학문, 충효, 절의가 높은 학자들과 신, 상신이 많이 배출되어 사람들은 우리 광김(光金)을

이 나라의 대표가 되는 명문(名門)이요, 예문종가(禮文宗家)로 삼한갑족(三韓甲族)이라 부른다.

(현주소 : 전남 담양군 대전면 평장리 평장동) 

 

과거없는 오늘이 있을 수 없고,

오늘 없는 내일 또한 있을 수 없다.

과거의 역사를 통하여 오늘의 삶을 진단하고

보다 나은 미래를 창조하자. 

 

- 광산김씨대종중 -

 

평장사 입구비

 

평장동에 도착하니 미리 연락을 받은 대종중 선술 의사회 의장님과 화평부원군파 도유사님, 대종중 종무원장님께서 벌써부터 오셔서 우리 일행들을

반겨주신다. ..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로 감사를 드리며 ... 

 

 홍살문 저 너머로 시조공께서 계시는 평장사가 보이고 감싸안은 불대산 머리위로 안개가 신령스럽게 올라간다

  

 홍살문(紅箭門)

 

 홍전문은 홍살문이라고도 한다.

 

 2005년 유물전시관과 동시에 세운 건물로 광산김씨 시조공의 신주를 봉안한 신성한 지역임을 의미하는 유교적 시설물이다. 

따라서 이곳을 찾은 방문객 모두는 경건한 마음과 정숙한 행동이 현대 문화인의 예절이라 하겠다.

 

 

- 광일문 -

 

 

11. 광일문(光一門)

 

 광일문은 평장동 취사당 정문이며 평장사 외문이다.

 

 광일문은 솟을 삼문의 형식으로 2개의 계단을 오르면 다듬돌 초석이 놓이고, 그 위에 원주가 놓이게 된다. 

이 문은 3문으로 되어 있는데, 취사당으로 들고, 날 때에는 우입좌출 또는 동입서출  즉, 입구에서 볼  때에 오른쪽 문으로 들어가고 나올 때는 왼쪽 문으로

나와야 하며, 가운데 신문으로 일반인들이 출입하지를  못한다.  평장사 내삼문 출입도 이와 같이 한다.

 1985년 당시 도유사 관순의 헌성금에 의하여 건립하였다.

 

 

보본숭현(報本崇賢)과 양육인재(養育人材)의 도장(道場) "평장사"

 

 사우란 신주를 모시고 제사 지내는 집을  말한다

이 곳 평장사는 광산김씨 후손들이 시조 신라왕자공 김흥광에 대한 추원보본의 도를

성경의 예로써 받들고 양육 인재를 위한 강학도장이다.

 

 사우는 설립목적이나 기능, 명칭상에서 서원과 그 성격이 크게 구별된다.

예컨데 서원이 양육인재와 사문진흥에 목적을 두고 강학의 기능을 담당하였음에 반하여

사우의 경우는 이러한 교육적 기능보다는 보본숭현의 구현에 더욱 비중이 있었다.

 

 그러나 17세기 후반기 이후부터 서원이나 사우는 모두 조선시대 양반들이 그들의 사회적 기능을 유지 보강하려는

같은 목표를 가진 것이었으므로 점차 그 엄격한 구별이 무너져갔다.

호남지역의 서원, 사우 건립은 전국 총 건립수의 20%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시기별로도 전라도가 선조 현종대에 전국 평균 사우점유율 34%를 휠씬 넘는 42%를 차지하고 있는 점이나,

숙종 - 정조대의 평균 56%를 크게 상회하는 65%에 달하는 점에서 돋보여진다.

이같이 서원보다 사우의 점유율이 높다는 것은 조선후기에 이르러 서원과 사우의 구분이 모호해졌다는 사실과

서원보다는 사우의 경우 문중적인 성향의 인물제향이 상대적으로 많다고 볼 수 있으며,

대원군이 섭정하면서 서원에 대한 일체의 특권을 없애고 설치를 엄금하고, 축소정비정책에 따라 더욱 심화되었다.

 

 가례에 의하면 사우는 반드시 앞을 남쪽으로 하고 뒤를 북쪽으로 하도록 하였다.

또한 사우의 건축공간은 반드시 축을 형성하였고 중요한 건물은 축을 중심으로 하고

주변의 건물을 좌우에 배치하여 건물의 위계성을 갖추도록 하고 있다.

평지에 세워지는 경우는 이러한 원칙을 적용하면서 축을 꺽던가,

아니면 축을 변형하여 병렬형 등으로 자연지세와 어울리도록 하였다.

 

 평장사는 전통 유교 건물로써 권위를 강조하여 정면 상부에 시조공 사우를 정점으로 하여

내삼문, 취사당, 광일문을 무등산 정상과 일직선 축으로 하고 주변의 시설물은 상호 대칭을 형성하여 위계성을 갖추었다. 

 

 

- 취사당 현판 -

 

 

취사당(聚斯堂)

 

  취사당(聚斯堂)은 양육인재를 위한 강학의 도장이다. 그리고 광산김씨 종중의 종사를 논의하는 화합의 장소이다.

취사라 함은 모든 후손은 이리로 모이라는 뜻이다.

취사당은 전면 5칸, 측면 2칸, 전 후퇴의 건물로 장대석 기단위에 디딤돌 초석이 놓이고 그 위에 원주를 세웠으며,

이익공 형식의 겹처마 건물로써 지붕은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유교 전통 서원 강당 형식의 건물이다.

 

 1849년 승지공 재경이 광주목사 재임시 4칸 사옥을 만들어 비각을 수호케 하였으나, 어느 때 훼철되었는지 알 수 없고,

1885년 재경의 아들 윤현이 광주목사 재임시 종회소가 없음을 개탄하고 솔선 봉금을 희사하고,

호남 제종의 협조를 얻어 당우 10칸, 고사 8칸, 문랑 5칸을 강사부지에 설립키로 하고 문헌공 영수가 취사당이라 명명 하였다.

 

 1888년(고종 25년) 5월에 상량문을 찬하고, 참판공 영목이 기하고, 판서공 수현이 발하고, 윤현공이 자서하였는데,

윤현이 준공을 못하고 남원으로 전임함에 따라 장성군수 오현이 계승하고 유사 상수, 수익, 용현, 제응 등이 간역하였다.

 

 1892년(고종 29년)에 준공하여 의성현령 윤현, 이조판서 수현, 선공감역 형수가 취사당 서를 쓰고,

홍주목사 오현, 이조참판 명묵, 사헌부감찰 진현, 병마절도사 중현 외 상수, 기현, 용현이 취사당 기를 썼다.

이때부터 취사당 입규를 정하고 중삼중구일에 후손들이 모여서 숭조목족을 위한 종사회의를 시작하였다.

 

 1948~1949년 평장동이 입산인들의 소굴이 되어 주민 소개와 함께 가옥 훼철 계획이었는데,

광주 영중, 용주의 주선으로 취사당이 온전하게 보존되었다.

 

 1950년 입산인들이 취사당에 연료를 쌓고 불태우려 하던 중 평장동에 사는 기수가 생명을 불구하고

나무단에 뛰어들어 이곳에 불을 지르려면 차라리 나를 죽이라고 설유하여 소각을 면하였다.

 

 1984년 도유사 관순, 중수위원장 용순, 집행위원장 희수가 평장동 성역화 사업을 시행하면서

대우그룹 김우중의 헌성에 의하여 취사당을 옛모습 그대로 이축하여 지금의 수존재로 보존하고 현재의 취사당을 중건하였다. 

 

시조공 사우제 대제를 준비하고 있는 취사당 

 

 

  

 

* 문헌상의 기록에 의하면 이곳 평장동에서 광산김씨의 종사는 1600년대 말, 1700년대 초부터 시작되었고,

취사당의 종무는 1892년 건물 준공과 동시에 취사당 입규를 정하고, 1912년에 경유사, 향유사 제도를,

1935년에 취사당 입규를 고쳐 평장동 종약으로 변경하여 체계를 갖추어 오다가

1967년에 현대식 광산김씨 대종중 종규를 제정하고 1986년, 2001년, 2004년에 개정을 통하여 현행의 종규로 운영되고 있다. 

중삼중구일 : 음력 3월 3일과 9월 9일

 

 

광산김씨 시조공의 사우 평장사(光山金氏 始祖公의 祠宇 平章祠)

 

 이 곳 평장동은 한국전통 명문가의 얼과 혼이 살아 숨쉬는 광산김씨 발상지이다. 

시조 신라왕자공 김흥광이 신라의 종말을 예지하고 왕자의 지위를 버린 채

이 곳에 둔세우거하여 후손들의 번영을 마련하여 주신 개기 유허지이다.

 

 성조의 개기 이래 후손 중에서 평장사가 많이 나와 세상 사람들이 이곳을 평장동이라 부른다.

평장동은 노령산맥 태조봉을 조산으로 하여 서남으로 수백리 굽이쳐 내려온 산맥의 정기가

불대산 소조봉에 이르러 기와 창을 세워 놓은 듯한 서른 여덟 개의 장군봉으로 웅대하게 둘러 싸여

힘차게 뻗어 내려와 평장사에 이르러 기맥이 응결하고 장엄하게 우뚝 솟아있는

호남의 명산 서석산을 안대하여 수백리를 흘러온 황룡강 물과 서로 만나

함께 안고 흘러가니 산맥과 물줄기가 살아서 움직이는 형상이다.

 

 시조공의 사당을 중심으로 좌우로 산맥이 다시 갈라져 백호의 줄기는 여덟겹이오,

청룡의 줄기는 일곱겹으로 그 형태를 보면

전체가 태극형을 이루고 좌우 청룡 백호의 날개가 균형을 맞추었으며,

주위의 산맥과 봉우리가 모두 명산으로

금태산, 서석산, 양림산, 삼각산, 건지산, 환등산, 삼선산 등이

우뚝 솟아있고 문필봉이 겹겹이 쌓여있다.

 

 불대산 봉우리를 봉황의 머리에 비유하여

전체의 전경을 봉항이 알을 품고있는 형상으로 표현하여 비봉포란형이라 하며,

용혈사수를 두루 갖춘 용진혈적으로

절의와 공명이 끊이지 않을 비기에 전하는 호남 제일의 명당이다.

 

 풍수학의 극치를 자랑하는 평장사는 원경에서 바라보면

감탄사가 절로 나올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하고

안에서 밖을 바라보는 조망은 점승적 최고조의 자연 풍광으로

조화의 섭리와 관용의 이치를 일깨워주는 호연지기 양생의 최적의 명소이다. 

 

 

  

광산김씨 발상지 평장동의 연혁(光山金氏 發祥地 平章洞의 沿革)

 

 평장동은 신라 무주의 서일동이니 본래 백제무진주인데 신라가 병합하여 도독을 두었고,

경덕왕 16년에 무주로 다시 부르게 되었다.

진성왕 6년에 견휜이 웅거하며 후백제라 칭하고 도읍을 전주로 옮기니,

궁예가 고려 태조 왕건을 정기태감으로 삼아 수군을 거느려 공략하고

주계를 정하였는데 성주 지훤이 굳게 지켜 불항하였다.

 

 태조 19년에 이르러 견훤이 아들 신검을 토벌하여 후백제를 멸망시켰다.

그 후 고려 태조 23년(940)에 광주로 고쳤다. 

성종 14년에 주를 낮추어 자사를 두었고, 뒤에 다시 낮추어 해양현으로 삼았으며,

고려 고종 45년에 공신 김인준의 외향으로 지익주사로 승격하고 광주목으로 하였다.

충선왕 2년에 다시 낮추어 화평부라 하였고, 공민왕 11년에 다시 무진부로 바뀌었는데

고려 혜종의 휘를 피하여 무(武)자를 무(茂)자로 고쳤으며,

공민왕 22년에 다시 광주라 하여 목사를 두었다.

 

 조선조에도 그대로 부르다가 조선 세종 12년에 다시 무진군으로 낮추었다.

문종 원년에 다시 광주목으로 복구했고, 성종 20년에 광산현으로 낮추었다가,

연산 7년에 다시 광주라 하여 목사를 두었으며, 인조 2년에 광산현으로 낮추었다가,

이조 12년에 주로 다시 하였다.

숙종 27년에 현으로 낮추었다가 숙종 33년에 다시 광주로 복구되었다.

 

 조선 1895년(고종 32) 전국을 23부로 나눌 때 나주부 관할의 광주군이 되었으며

1935년 광주가 부로로 승격됨에 따라 광산군이 되었다가

1910년 경술년 왜정 때 현재의 담양군으로 편입되었다.

 

 이 곳 지명의 시원은 본래 백제 무진주에 소속된 마을이었고,

통일신라 때는 무주 서일동으로 불리워 오다가

지금으로부터 약 1,200여년전 신라말에 광산김씨가 이 곳에 살면서

고려 초기에 평장사가 많이 나와 평장동으로 불리게 되었고,

1910년 경술국치 후 왜정 때 화아로 동명이 바뀌었으나,

광산김씨들의 동명 복원운동에 의하여 1924년 평장동으로 환원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광일문에서 바라다 본 취사당과 평장사 - 

 

명문화벌 광산김씨(名門華閥 光山金氏)

 

 광산김씨 역사는 평장동으로부터 시작되었으며, 그 역사는 천년이 넘고,

지금의 후손이 백만을 헤아린다.

장구한 역사의 변천속에서 영욕과 부침을 거듭하면서 명문화벌로 성장 발전 하였다.

 

 시조 할아버지 김흥광은 장차 국란을 예지하고 왕자의 지위를 버린 채,

이 곳 평장동에 둔세우거 하시어 후손들의 번영을 마련하여 주셨다.

할아버지의 음덕에 기인하여 후손들이 번창하여

삼한갑족, 명문거족, 예문종가로 자리매김되고 있으며,

명신거유와 충의열사들이 줄을 잇고,

동방이학의 종사 문안공 김양감 선생님, 조선예학의 태두이며

기호학파의 거두이신 사계 김장생 선생님이 유학의 대통을 계승하고

국민순화와 학문발전에 크게 공헌 하였다.

 

 광산김씨 조상님들은 어떠한 역사적인 사건속에서도 대의와 명분을 생명력으로 하여

국가와 사회발전에 기여한 명문의 전통은 역사속에 찬란하다.

 

 겨레의 스승을 제사하는 문묘배향 18현 중 광산김씨 조상님이 두 분이나 되고,

또한 부자 명현으로 유명하다.

종묘에 배향된 보익공신이 세 분이고,

전국 쉰한개의 서원에서 여든두 분의 조상이 배향을 받고 있다.

"삼정승이불여일대제학" 이라는 대제학이 열한 분이며,

예문관 홍문관 양관 대제학이 일곱분이고,

형제대제학, 삼대대제학 배출가문은 유일하게 광산김씨뿐이다.

 

상신으로는 고려조 12평장을 비롯하여

조선조에 영의정이 두 분, 좌의정이 한 분, 우의정이 두 분이며,

관리의 표상인 청백리가 네 분이고, 인재의 등용문인 호당이 세 분이며,

부조묘가 열세 분, 시호를 받으신 분이 쉰여섯 분이다.

등단에 오른 대장이 아홉분이요,

임금앞에서 경서를 강의한 경연관이 열두 분이며, 조선조 문과 급제자가 이백예순다섯분이다.

 

 인후온화한 부덕이 조선 제일의 왕비였음에도 불구하고 짧은 생을 마친

숙종 왕비 인경왕후와 여원동정 연합군 창설시

소용대장군 우부도통 문숙공 김주정과 군함 900척 건조의 총책 양간공 김연,

국왕의 시호에 충성충자를 붙여야했던 속국의 진공사 신분으로 원나라 황제와 당당히 맞선 문정공 김태현,

무소불위한 부패권력을 응징한 김광철, 요승 신돈을 죽이기 위해 결사체를 만들었다가

오히려 해를 당한 김정과 김흥조,

역성혁명을 반대하고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킨 김약시와 김자진,

백척간두에 선 나라의 위난을 구하였던 의병장 충장공 김덕령장군과 근시재 김해 의병대장을 비롯하여

병자호란 임진왜란 등 외세의 침략과 숱한 국란의 현장에서 순절로 충절을 지킨 수 많은 조상님과

 

 음률에 밝아 아악을 정리한 김첨, 인수방에서 살았다하여 인수체로 불리우는 조선의 명필 자암 김구,

어머님을 위하여 유배지에서 구운몽을 쓰고 임금의 방탕함을 바로잡기 위하여 사씨남정기를 쓰는 등

충효를 위한 목적소설로 우리 근대 소설 문학사에 찬연한 업적을 남기신 서포 김만중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걸출한 인물들을 배출한 동방의 화벌 명문가이다.

 

* 삼정승불여일대제학 : 정승 세 명이 대제학 하나만 같지 못하다.

* 여원동정연합군 : 고려와 원나라가 연합하여 일본을 정벌하기 위한 군사

* 불사이군 : 신하는 두 임금을 섬기기 않음

* 무소불위 : 모든 것을 다할 수 있음.

 

 

 수존재(修存齋)

 

 수존재는 종직자들과 참제자들이 숙박과 식당으로 겸용하는 시설물이다.

 

 수존재는 본래 취사당 건물이었으나, 1984년 현 취사당 중건시 원형대로 이축하여 수존재라 편액하고 순택이 기문을 지었다.

이 수존재는 전면 5칸, 측면 2칸, 전 후퇴로 석축 계단을 통해 오르게 되어 있다. 가구 형식은 굴도리 형식으로 팔작지붕에 홑처마를 하고 있다.

 

 

 경모재(敬慕齋)

 

 경모재는 시조공의 제수를 준비하고 제기를 관리하는 곳이며, 현대에 와서는 종무 관리 사무실로도 병용되고 있다.

 

 경모라 함은 공경하고 사모한다는 뜻이다.

추원하고 보본하는 마음도 여기에 있으니 시조 왕자공을 경모하는 집을 창건하고 경모재라 편액하였다.  광주지방법원장 연수가 기문을 지었다.

 

 이 경모재는 전면 3칸, 측면 1칸, 전퇴의 건물로 건계를 통해 기단을 오르게 되어 있고, 기단은 장대석 기단으로 다듬돌 초석을 하고 굴도리 가구를 가진

팔작지붕의 겹치마 형식의 건물이다.

 

 1956년(도유사 연수) 유사들은 재숙하고 제수 장만할 곳이 없음을 걱정하고 경모재 창건을 결의하고 봄에 기공하여 동년 8월에 준공하였다. 

 이때 나주 동수가 거금을 헌성하고, 당유사 영만, 동석이 많은 노력을 하였다. 

 1984년 도유사 관순, 중수위원장 용순, 집행위원장 희수가 평장동 유허지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면서 재일교포 영희 헌성에 의하여 경모재를 개축하였다. 

 

 

 

평장사 묘정비(平章祠 廟庭碑)

 

 묘정비는 2002년 시조왕자공 사우를 복원하고 세운 비로써 묘정내의 유일한 비다.

평장사를 오르는 계단 밑 취사당과 경모재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묘정이라 함은 평장사 경내의 경계를 말함이며, 담장으로 구분한다.

 

 비신은 6척으로 운두구좌형이다.

 비문의 내용은 시조 왕자공 사우복원에 대한 동인과 전말을 기록하고 있다. 글은 황수가 짓고, 글씨는 영원이 썼다.

 

 

 

 

 

 - 유허비각 (전라남도 지정 문화재 기념물 200호) -

 

 

시조공의 유허비와 비각

 

 유허비(遺墟碑) : 서기 1737년(영조 13년)에 사계 김장생의 현손 참찬공 퇴어자 김진상과 지추공 김진동,

봉사공 김복택, 현감공 김성택이 호남 제종과 입비를 추진하였다.

 

 1739년 수비와 함께 비각을 준공하고 참찬관 퇴어자 김진상이 유허비 음기를 지었고, 통덕랑 김회풍이 명을 지었다.

비각 안의 비는 2002년 1월 12일 전라남도 지정문화재 기념물 200호로 지정되었고,

유허지 7,145가 문화재보호구역으로 확정되었다.

 

 평장동 유허비는 좌대와 비신, 지붕돌로 구성되어 있다. 높이 249cm, 너비 75cm의 비 전면에는 "신라왕자유허비" 라 하였고,

앞면 오른쪽에 "유허비명" 이란 제하의 119자의 내용이 쓰여 있으며,

왼쪽에 비를 세우는 일에 참여한 4명의 이름과 관직, 이름 등 26자가 각인되어 있다.

뒷면에 김진상이 쓴 "유허비음기" 라는 제목하에 180자의 내용과 23자의 세운 시기와 글씨를 쓴 사람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내삼문(內三門)

 

 내삼문은 광산김씨 시조 할아버지의 신주를 모신 신전 출입문이다 

 26개의 통석계단을 오르면 다듬돌 초석위에 원주가 세워진 솟을 삼문과 3문 형태의 유교 전통 양식으로 2002년 평장사와 함께 지은 건물이다

 

 * 광산김씨의 성을 가진 모든자 할아버지 신전앞에 머리 숙이라,

    그리고 감사하라, 성도 이름도, 가지고 있는 모든것 할아버지 음덕에 기인함이다.

   

 

평장사(平章祠)

 

 평장사는 광산김씨 시조공 신라 왕자 김흥광을 매년 음력 시월 초하루에 백만의 후손들이 모여 음덕을 기리고 제사 모시는 사당이다.

 

 후손된 자 조상을 봉양함은 강상의 법도이고, 성경의 예로써 중히 함이 인륜의 도리이다.

또한 명문의 시조공 향례는 사우봉향이 예에 합당하다.

 

 광산김씨 조상님들은 1722년에 건사 발의를 하고, 1786년에 완공하여 이름을 "종사당"이라하고, 1796년에 문안공을 설향하였다.

발의 후 준공까지 64년이며, 준공 후 봉향까지 10년이다. 74년에 걸려 이룩한 감격의 첫 봉향이었으나,

당년에 모함 당하여 수 많은 조상님들이 옥고를 치루었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광주목사에게 단자를 올리고, 부월을 무릅쓰고 정조에게 김필중 외 176명의 조상님들이 가전상소까지 올리면서

이듬해 1797년 시조공을 봉안하였던 통한의 역사가 평장지에 구구절절하다.

 

 광산김씨 조상님들이 그토록 정성을 다하여 이룩했던 사우봉향이 당시의 법도와 세속이 혼탁하여 존속되지 못하고

훼철이라는 슬픈 과거의 역사속으로 묻혀버린 채 불가피하게

차선으로 선택 하였던 단제봉향이 1920년 설단 이래 장장 82년 동안 지속되었다.

 

 2002년 도유사 황수가 시조공 사우복원사업 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제단터에 옛 사우를 복원키로 하고

종인들의 정성을 한데 모아 조상님들의 유훈을 받들어

대물림된 유명을 성공적으로 완수하고 "평장사"라 이름 하였다.

이로써 광산김씨 통한과 비원의 세월 280년의 역사를 마감하였다.

 

 시작과 완성의 늦음이 당시의 시류와 세속에 연유함이었으나, 이제 본말을 바로하여 예문종가의 위상을 명실상부하게 당당히 하였다. 

 

 

 광산김씨 시조 왕자공을 모신 평장사에서 반곡 소양회장과 담계 흥준 상임고문께서 예를 올리고 있다.

 

 

 

 시조 왕자공께 예를 올린 후 부산종친회 임원일동

 

 평장사에 대해서 알기쉽게 해설하고 계시는 선술 대종중 의사회 의장님

 앞에 보이는 광주의 진산 무등산이 이곳 불대산 평장사를 향하여 일직선을 이루고 있으며, 이곳을 향해 절을 하고 있는 형상이라고 ....

 하얀 안개 구름이 무등산을 휘감싸고 있는 풍광이 신비스럽기까지 하다.

 

 

 

 

 

 

 2세 선조님 부터 13세 선조님을 모신 제단과 모선문

 

 

 

 

 

 

 그 동안 시조공을 모셔오던 제단 / 광산김씨 역사유물관앞에 있다

 

 

 평장동의 우물 / 이곳 우물은 신령하여 조선조에는 광김의 자손이 대과에 급제 할 때면 이 곳 우물에 새우가 낳이 나왔다는 전설이 있다

 우물이 잘 정된되어 있다 / 우물 정(井)字형으로 되어 있고, 아래로 흘러 내리는 물이 표주박을 통해서 내려가도록 설계되어 있다.

 

 광산김씨 역사유물관

 광산김씨 각종 유물들을 잘 정된 보관하고 있는 곳으로 지난 해에는 1,500여명이 이곳을 들려 광산김씨에 대해서 배우고 갔다고 합니다

 

 

 선술 의사회 의장께서 유물관에 대해서 해설하고 계신다.

 광산김씨 선조님들의 초상

 

 

 

 

 

 

 선조님들의 각종 교지들이 가득하다

 

 

 

 

 

 

 

 

 

 

 

 

 

출처 : 사진이 있는 "양촌재의 행복갤러리"
글쓴이 : 촌장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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